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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학

애덤 스미스와 국부론

by SeanKirk 2022. 9. 8.

1.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생애

    1723년에 태어나 포스 만을 사이에 두고 에든버러의 건너편에 위치한 작은 항구도시 커칼디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스미스는 어린 시절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독특한 생김새와 더불어 신경쇠약, 말더듬이 증세도 가지고 있었다. 

    우등생이었던 스미스는 14세에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하여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하였다. 1740년 신학 공부를 위해 옥스퍼드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학교 당국에 대한 불만과 허치슨 교수의 친구인 데이비드 흄의 회의론에 큰 영향을 받아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자퇴하였다.

    1748년 모교 글래스고 대학에서 논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허치슨이 갑자기 강단을 떠나게 되면서 도덕 철학과 교수 자리를 맡게 된다. 1759년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를 발표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1764년 버크럭 공작의 장남의 개인 교사가 되기 위해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 소년의 어머니는 스미스가 존경하던 찰스 타운젠트와 재혼했다. 찰스 타운젠트는 영국의 재무대신을 역임하였고, 식민지의 미국인들을 분개시켜 보스턴 차 사건을 유발함으로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개인교사가 된 스미스는 2년여에 걸쳐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하게 된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약 10여년 간의 저술 활동 끝에 1776년 그 유명한 [국부론]을 발표하였다. 

    1778년 스코틀랜드의 관세 위원이 되었고, 1787년 글래스고 대학 학장을 지냈다. 

    함께 모시고 살던 어머니의 죽음 이후 몇 년 후인 1790년 스미스도 생을 마감하게 된다. 

   

2. [국부론]의 탄생 배경

    스미스의 부친은 연합조약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 해안에 밀수가 급증한 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를 지켜본 인간의 거짓됨의 참람함을 깨닫고 정부의 법과 규칙을 강화하는 방법 즉, 관세 보호 등을 찾게 되어 [국부론]을 썼다는 의견도 있으나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부친이 사망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의견이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탄생 배경의 시작은 데카르트, 갈릴레이, 뉴턴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계몽주의라 할 수 있다. 당시 사상의 주가 되었던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스미스도 세상사의 원인과 결과, 즉 인과관계를 알아내는 데 흥미가 있었다. 갈릴레이, 뉴턴과는 달리 초점을 하늘의 별에 맞추지 않고 땅 위에 인간들에게 맞추었다. 이러한 생각의 결과로 [도덕감정론]을 저술하게 되었다. 

    교수직을 사임한 후 개인 교사로서 프랑스에 머물며 중농주의 학파를 접하게 된다. 여기에서 경제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의 폭이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부론]의 원제는 [모든 국민의 부의 성질 및 원인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미스는 부의 원인을 알아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의 공통적 욕구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게 되는데 그 욕구, 즉 성향은 '모든 인간은 잘살고 싶어 한다'라는 것과 '자기가 가진 것을 남의 것과 바꾸고 싶어 하는 욕구는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는 공통된 성향이다'라는 것이다. 경제학사 상 가장 빈번히 인용되는 한 구절에서 스미스는 이렇게 공언한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돈벌이에 대한 관심 덕분이다." 즉, 잘 살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본능이 친절성, 박애심, 희생정신 같은 것보다 더 강력하고 지속해서 인간에게 동기 부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18세기 당시의 세계는 전형적으로 봉건주의와 절대주의를 대변하는 '구질서'와 자본주의, 자유주의를 대변하는 '신질서'의 과도기였다. 1760년대 산업혁명이 시작되었고 기술혁신으로 기계화를 가져왔다. 기계화는 대량 생산 체제를 가져왔고 이를 통해 생산된 많은 제품은 넓은 시장이 필요했고 자유무역이 싹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시민 정신이 생기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영국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국이 어떻게 유럽의 균형을 잡아주는 국가가 되었는지와 그 결과 중농주의를 채택한 프랑스, 중상주의를 국가 경제정책으로 밀어붙인 스페인을 물리치고 당시 세계 최강국이 되었는가에 대한 고찰이 [국부론]이라는 책으로 출간되게 된 것이다.

 

3. 국부론의 기본 사상

가. 노동 가치설

    애덤 스미스는 가치척도의 수단으로서의 노동의 가치에 주목했다. 그 당시는 금의 가치도 불안정한 시대였기 때문에 안정적인 척도인 노동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이 경제성장의 엔진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가장 중요한 원칙인 '분업'에 대한 사상이 탄생하게 된다.

나. 분업

    애덤 스미스의 '핀 공장'의 사례는 경제학사에 길이 남을 명문이다. 노동자 한 사람이 하루 종일 노력해도 핀 20개는 커녕 단 하나도 만들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다섯 명의 사람이 철사 자르기, 바르게 펴기, 끝 뾰족하게 만들기, 핀 머리 갈기, 붙이기 등으로 나누어서 한다면 한 사람당 하루 4,800개의 핀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업은 어떻게 이렇게 생산량 증대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첫째, 숙련도 증대 둘째, 작업 전환 소요 시간 단축, 셋째, 작업능률을 향상할 수 있는 공구나 기계의 고안 가능성 등이다. 

     이 분업에 대한 생각은 국가 간의 분업으로 즉, '절대우위론'으로 확장하게 된다. 

다. 절대우위

    스미스는 자유무역을 지지하면서, 만일 영국이 어느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 같은 상품을 외국에서 사들이는 비용을 초과한다면, 영국으로선 자체 생산을 중단하고 수입에 의존하는 것이 득이 된다는 것이다. 

라. 보이지 않는 손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단어 '보이지 않는 손'은 스미스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부분에서부터 시작된다.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는 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는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적 결실도 얻게 된다."

    여기에서 처음 등장한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적 조화를 담당하는 진정한 지휘자와도 같은 '자유방임 시장' 체제를 의미한다. 이 보이지 않는 손은 투입된 재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경우 생산을 중단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판단은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하는 것이다.

    또한 이 보이지 않는 손은 어떤 사람 혹은 기업이 장기적으로 적정선을 초과한 이윤을 남길 수 없도록 하기도 한다. 경쟁이란 도구를 통해서. 

마. 국가의 역할

    스미스는 정부의 역할을 세 가지로 명료하게 밝혔다. 첫째, 국방의 의무 둘째, 법치에 의한 사회 정의 유지 셋째, 도로, 운하, 교량, 교육 등의 공공시설과 제도 관리를 통한 군주(국가)의 존엄성 확립이 그것이다.

4. 결론

    노동이라는 엔진은 노동력의 공급이 증가하거나, 노동이 분화되거나, 새로운 기계 도입 등으로 노동력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질 때 가속된다고 주장했다. 투자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들과 발명이 차례로 등장하고 자유로운 상거래가 허용될 때 국가의 부는 증대되고 이러한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소득은 일반 서민들이 높은 수준의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분업화되고 효율적인 노동과 자유로운 시장경제 체제를 갖춘 국가가 부를 최대한 창출해 낼 수 있는 국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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